문제인식은 비슷한데, 해결책은 천지차이다
당구연맹이 3억을 걸었습니다 — 제가 10년간 붙들고 있는 문제에
경쟁자를 정리하는 일은 사업하는 사람의 기본입니다. 저도 진작에 해뒀습니다.
점수판을 만드는 곳이 있고, 대회를 운영하는 곳이 있고, 실력을 재보려는 시도도 해외엔 이미 있습니다.
각자 당구의 한 조각씩을 붙들고 있죠.
이걸 보고 긴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반대로 봤습니다.
여러 곳이 같은 데를 파고 있다는 건, 거기 뭔가 있다는 뜻입니다. 조각 서비스가 존재한다는 건 위협이 아니라 수요가 검증됐다는 호재입니다. 아무도 안 파는 땅이 훨씬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당구에 문제가 있다"는 건 저만의 발견이 아니었습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게 문서로, 그것도 당구 전문 기관에서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발주까지 한 것을 보니 새삼 누빌앱이 제대로 보고,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1. 3억짜리 문서
대한당구연맹이 4월에 낸 제안요청서
「K-Billiards 디비전 플랫폼 2.0 구축 사업」. 사업비 3억 원, 올해 12월 완료 목표.
맨 앞에 「추진 배경 및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 이 돈을 써야 하는가를 적는 자리죠. 제가 정리해 둔 문제 목록과 나란히 놓아봤습니다.
연맹이 적은 것 제가 적은 것
| 데이터가 흩어져 있다 | "개별 시스템 운영으로 데이터 및 서비스가 분산" | "측정·대회·매칭이 흩어져 있다" |
| 대회가 일회성이다 | "대회 종료 시 데이터 및 서비스 활용이 단절되는 구조" | "75%는 첫 관문에서 탈락 — 한두 게임 치고 집에 간다" |
| 동호인이 안 잡힌다 | "선수·동호인… 연계된 통합 관리 체계 부재" | "실력이 서로의 인정에 의존 — 아는 사람끼리만 친다" |
| 저변은 큰데 산업이 안 된다 | "디지털 플랫폼 기반 산업 전환 요구" | "사업체는 10%인데 매출은 1%" |
조각이 아니라 목록 전체가 겹칩니다. 그리고 뒤에서 두 개가 더 나왔습니다.
2. 겹치는 걸 넘어 같은 말을 합니다
"당구는 재미있다"
연맹은 올해 통합 브랜드 'K-빌리어즈'를 내놓으면서 핵심 가치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당구는 운동이다, 당구는 재미있다"
누빌에서는 이 재미를 시스템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승리확률, 실력발휘율. 이런 데이터들이 당구게임을 더 재미있게 할 것입니다.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를 즐기는 수준으로 갑니다.
당구가 스포츠가 되려면 실력을 재야 하고, 실력을 재려면 데이터가 쌓여야 하고, 데이터가 쌓이려면 사람이 써야 하고, 사람이 쓰려면 재미있어야 합니다. 재미는 곁가지가 아니라 첫 칸입니다.
당구장 안으로 들어옵니다
제안요청서에 이런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사용자(개인/동호인) 주도의 당구장 기반 자율 매치(개인 간 리그) 개설 기능 제공
개인 간 자율 매치 결과의 공식 랭킹 시스템 직접 연동
대회장 얘기가 아닙니다. 동네 당구장에서 친구랑 친 판을 공식 기록에 넣겠다는 겁니다. 어뷰징을 걸러내는 알고리즘까지 요구사항에 넣어놨습니다. 곁다리로 적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누빌앱이 추구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3. 이 문서의 값어치
저 아닌 사람이 쓴 문서라는 것
제가 사업계획서에 "동호인이 아는 사람끼리만 친다"고 백 번 써도, 그건 제 주장입니다. 창업자는 원래 자기 문제가 커 보입니다. 투자자도 그걸 압니다.
그런데 이건 다릅니다. 연맹이 썼고, 예산이 붙었고, 12월에 물건이 나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들이 실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데 이보다 나은 자료는 없습니다.
제 발상이 독특하지 않다는 것, 이미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 — 이게 이 문서가 저에게 준 값어치입니다.
독특하지 않은 게 왜 좋으냐고요? 독특한 문제 인식은 대개 시장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1,000만 명이 치는 종목에서 나 혼자만 보이는 문제라면, 그건 문제가 아니라 착각일 확률이 높습니다.
4. 그런데 여기서부터 갈립니다
문제를 같이 봤다고 답이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같은 지점을 보고도 연맹과 저는 다른 곳에 손을 댔습니다. 그 얘기는 길어서 다음 글에 따로 쓰겠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만 남겨두겠습니다. 저는 당구에 실력 기준이 없다는 것이 이 모든 문제의 뿌리라고 봅니다. 골프엔 타수가 있고 볼링엔 핀이 있는데, 당구엔 실력을 잴 절대 기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이 동네에선 20점이고 저 동네에선 15점입니다.
이 하나를 바꾸지 않으면, 나머지를 아무리 잘 정리해도 제자리라고 봅니다.
저는 65세이고 개발자가 아닙니다. AI와 씨름하며 누빌이라는 앱을 만들고 있습니다.
연맹 문서를 덮으면서 든 생각은 "큰일 났다"도 아니고 "드디어 알아줬다"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동안은 문제가 있다는 것부터 설득해야 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 당구연맹의 문서를 놓으면 됩니다.
저는 그다음 얘기만 하면 되고요. 그다음 얘기가 진짜입니다.